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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시대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 총성 속 진심, ‘암살’ 속 감정의 서사
- 액션과 미장센, 그리고 시대극의 완성도
누구를 위한 총이었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켠이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암살>은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총성과 폭발음, 화려한 미장센 뒤에는 나라를 빼앗긴 땅 위에 살아야 했던, 혹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들의 고뇌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가가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늘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그 속의 누군가는 영웅으로, 누군가는 배신자로 남는다. <암살>은 바로 그 경계 위를 묵묵히 걷는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처럼,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과 논리를 지닌 채 움직인다. 누가 옳고 그른지 명쾌하게 단정짓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실적이고, 더 아프다.
이 영화가 인상 깊었던 건 바로 그 ‘균형감’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엔 전지현이 연기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이 있다. 그녀는 단순히 지시받은 암살을 수행하는 병기가 아니다. 그녀는 갈등하고, 의심하고, 때론 흔들린다. 하지만 끝내 옳다고 믿는 선택을 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인간적인 존엄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안옥윤을 둘러싼 인물들. 하와이 피스톨, 속을 알 수 없는 염석진, 이상한 매력을 가진 윤봉길 역할의 최덕문까지. 이들은 누가 봐도 일관되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실제 역사에 가까운 캐릭터들이었다.
<암살>은 그렇게 시대의 무게를 캐릭터에게 고스란히 안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과 선택, 갈등과 후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 조부모 세대, 혹은 그보다 앞서 희생된 수많은 이름 모를 이들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나라를 위해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했고, 또 누군가는 타협했을 것이다.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은 더 이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느꼈다.
1. 시대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영화 <암살> 속 인물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이들은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생존자들이었다.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단연 안옥윤이다. 그녀는 독립군의 저격수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비극적인 존재다. 그녀가 맡은 암살 임무는 단순한 작전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전지현은 이 인물을 놀라울 정도로 절제된 감정 연기로 표현해냈다. 과장되지 않지만 충분히 강렬하다.
반면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 피스톨은 이념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총으로 먹고사는 용병이지만, 정의와 감정 사이에서 고민한다. 처음엔 단순히 돈을 보고 접근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른다. 그 변화는 소리 없이 이뤄지지만, 관객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염석진이다. 조국과 신념을 버린 친일파의 상징과도 같은 이 캐릭터는, 비겁함과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정재는 이 캐릭터를 무섭도록 정교하게 연기하며, ‘악역’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나는 이 세 인물이 모두 ‘그 시대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중 누군가는 가해의 편에 섰지만, 그것 역시 시대의 압력과 공포 속에서 내려진 선택이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쉽게 흑과 백을 나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놓치기 쉬운 ‘회색 지대’를 보여준다. 그곳이야말로 진짜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다.
2. 총성 속 진심, ‘암살’ 속 감정의 서사
<암살>은 총격전이 많은 액션 영화지만, 그 속에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특히 캐릭터 간의 관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이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예를 들어 안옥윤과 하와이 피스톨 사이에는 명확한 로맨스는 없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총을 맞고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그 감정이 오롯이 드러난다. 둘의 관계는 결국 선택과 신념의 대칭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안옥윤이 자신이 쌍둥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 감정의 파도는 관객의 심장을 한 번에 휘어잡는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염석진과 안옥윤 사이의 긴장감은 영화의 중반부터 후반까지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다. 두 사람은 단순한 적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 사이의 대립은 더욱 극적이고, 현실적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장면은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쌓여간다. 마치 마음속 먼지를 쓸어내듯, 감정은 서서히 관객 안에 들어온다. 그 자연스러운 감정선 덕분에, 마지막 총성이 울릴 때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3. 액션과 미장센, 그리고 시대극의 완성도
<암살>은 스토리와 감정뿐 아니라 시각적인 완성도 면에서도 상당히 정교하다. 1930년대 경성을 재현한 세트와 복식, 거리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 자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는 특히 ‘카페 대치신’에서의 촬영 구도가 인상 깊었다. 느린 카메라 무빙과 긴장감 있는 편집, 그리고 조명까지. 총격전이지만 오히려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은 액션의 쾌감과 동시에 시대극 특유의 무게를 함께 전달해준다.
의상과 분장의 디테일도 뛰어났다. 안옥윤의 복장은 그의 정체성과 연결되고, 하와이 피스톨의 복장 역시 그 캐릭터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각 인물들이 입은 옷 하나, 소품 하나에까지 그들의 서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운드 역시 훌륭했다.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음은 묵직한 현악기 위주로 구성되어, 전체적인 분위기를 장악하면서도 감정선은 놓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은 아직도 귀에 맴돌 정도로 인상 깊었다.
또한 이 영화는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한 장면 한 장면에 의미를 담고 있다. 지하 통로, 일본식 저택, 시위대가 모인 광장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대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감독 최동훈은 스타일리시한 액션 영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암살>에서는 그 스타일 속에 감정과 철학을 담아냈다. 이 균형이 <암살>을 단순한 ‘역사 영화’가 아니라,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로 만들어주었다.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가, 지금 다시 물어야 할 질문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음속에 묵직한 돌 하나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돌은 단지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는 솔직히 이 질문이 너무 두렵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혹은 두려움에 침묵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괜히 마음이 저릿하다.
<암살>은 그저 멋진 영화, 잘 만든 시대극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질문을 품고 있는 영화다. 누군가는 이념을 위해,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선택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택들이 모여 만들어낸 오늘을 살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의 무게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포장하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시간과 고민, 갈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경 아닐까.
<암살>은 그런 의미에서 ‘기억의 영화’다. 스펙터클하고 스타일리시하지만, 그 속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삶과 죽음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그리고 단순한 재미를 넘어,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천천히 곱씹어봤으면 좋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옥윤이 가만히 앉아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표정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 그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조금은 느껴야 할 감정일 것이다.
기억하자, 그리고 잊지 말자.
그들이 선택했던 그 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