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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태식이라는 사람 — 세상을 끊어낸 남자의 얼굴
- 아이와의 연결고리 — 무너진 세계에서 피어난 관계
- 폭력 속 진심 — 액션이 전한 감정의 울림
총보다 묵직한 침묵, 영화 <아저씨>의 진짜 울림
원빈의 얼굴이 이토록 무표정하면서도 슬플 수 있다는 사실을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됐다. 그는 총을 들고도 차분했고, 사람을 제압하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 하나를 지키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그의 뒷모습은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나는 <아저씨>를 여러 번 봤지만,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그 이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저씨>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그리고 인간 관계의 가장 바닥에서 출발한다. 전직 특수요원이었지만 이제는 낡은 아파트에서 무표정하게 살아가는 태식. 그는 주변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삶에 ‘소미’라는 아이가 들어오면서 균열이 생긴다. 관계를 원하지 않았고, 감정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던 태식에게 소미는 처음으로 ‘책임’이라는 감정을 만들어준 존재다.
이 영화는 아동 인신매매, 마약, 장기 밀매라는 현실의 지옥도를 전면에 드러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다. 진짜 이야기는, 그런 지옥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느냐에 있다. 아이를 위해 싸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자신의 감정을 되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특히 이 영화가 감정을 절제하며 전달하는 방식이 참 좋았다. 누구도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고통을 끌어안고 조용히 폭발한다. 그게 오히려 더 진심처럼 느껴진다. 침묵의 무게가 총보다 무겁다는 걸 <아저씨>는 보여준다.
이제부터는 <아저씨>를 통해 내가 느낀 가장 뚜렷한 인상 세 가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태식이라는 인물이 가진 고립의 의미, 두 번째는 소미를 통해 다시 시작된 관계의 가능성, 세 번째는 폭력 속에서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었던 감정의 힘. <아저씨>는 인간을 다시 믿게 해주는 영화다.
1. 태식이라는 사람 — 세상을 끊어낸 남자의 얼굴
태식은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 심지어 식사조차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 그는 철저히 고립된 인간이다. 나는 이 인물을 보면서 ‘스스로 삶을 정지시킨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살아있지만, 살아가고 있지 않은 사람.
그의 외모는 단정하고 행동은 조용하지만, 눈빛은 늘 어딘가를 경계한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후유증이 아니라, 세상 자체에 대한 불신이다. 내가 보기엔 태식은 ‘더 이상 누구와도 얽히고 싶지 않은’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잃었고, 그 감정이 너무 컸기에 다시 그런 상처를 마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관계를 끊었고, 스스로를 감정 없는 기계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죽은 것이 아니라, 깊이 숨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태식의 침묵이 오히려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느꼈다. '내가 이만큼 상처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태식이 누군가를 다시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의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이건 복수의 여정이라기보단, 무너진 감정을 회복하는 여정이다.
2. 아이와의 연결고리 — 무너진 세계에서 피어난 관계
소미는 외로운 아이였다. 어머니는 불안정했고, 주변 어른들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였고, 그 외로움을 본능적으로 태식에게 기대기 시작한다. 나는 이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고, 그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소미는 태식에게 말을 걸고, 먹을 걸 주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다. 태식은 처음엔 무심하게 굴지만, 점점 그녀의 존재가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 나에겐 이 변화가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누구나 처음엔 벽을 치지만, 상대의 진심이 느껴질 때 마음을 열게 된다.
특히 감정이 닫혀 있던 태식이 소미와의 짧은 대화, 함께 나눈 시간들 속에서 미묘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지키고 싶어졌고,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소미가 없었다면 태식은 영영 감정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은 아이는 그에게 두 번째 삶을 열어주는 열쇠였다. 이 관계는 피로 맺어진 것도, 이해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관계였다.
3. 폭력 속 진심 — 액션이 전한 감정의 울림
<아저씨>는 한국 영화 중 손꼽히는 액션을 보여준다. 빠르고 정교하며 리듬감 있는 편집, 원빈의 피지컬을 극대화한 시퀀스들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내가 더 주목했던 건, 그 모든 액션의 중심에 있는 ‘동기’였다. 태식은 싸우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이 영화가 폭력을 감정의 전달 수단으로 사용한 방식이 인상 깊었다. 태식은 말하지 않지만, 싸울수록 감정이 드러난다. 상대가 강해질수록 그의 결심도 강해진다. 결국, 그는 소미를 구하기 위해 어떤 폭력도 감수한다. 그 결심은 단순히 분노가 아니라 ‘구원의 의지’다.
마지막 총격전, 칼날 위의 싸움, 그 모든 순간에서 태식은 하나의 목표만 바라본다. 소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태식의 태도는 인간성을 잃은 세계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고 흘리는 그의 눈물.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감정을 되찾은 인간의 눈물이었다. 액션이 끝난 자리에 남은 건 잿더미 속 생명, 그리고 오래 잊고 지냈던 감정의 온기였다.
끝내 지켜낸 감정, 그 모든 싸움의 이유
<아저씨>는 내게 ‘감정의 복원’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했다. 태식은 상실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과 감정, 인간관계를 모두 차단한 채 살아왔지만, 소미라는 작은 존재로 인해 다시 감정을 되찾는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의 복원이 얼마나 절절하고 설득력 있었는지 느꼈다.
이 영화는 폭력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건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분노하고, 싸우고, 끝내 지켜내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였다.
태식의 싸움은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아이를,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나는 그 진심이 너무 깊고, 너무 고요해서 잊히지 않는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장면마다 사랑과 회한, 절박함이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단순히 잘 만든 액션이기 때문이 아니라, 액션을 통해 감정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모든 사람에게, 외로움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아직 누군가를 위해 싸울 수 있는가?” 그 질문은 나에게 오래 남았다.